어릴 적 할머니는 10리 정도 떨어져 있는 먼 절에 다니셨다. 그래서 절에 가는 날이면 새벽 네 시부터 분주한 준비가 시작됐다. 어린 마음에 멀리 가는 할머니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가지 마라고 응석 부렸던 적도 있다. 그땐 할머니를 이해할 수 없었던 것 같다. 그리고 세월이 지나서 나는 초파일만 되면 여전히, 수십 년 째 산골 오지에서 한결같이 낡고 바랜 그곳으로 향한다. 할머니를 생각하며 하얀 백등을 단다.

 

어두운 시기,

하나의 발원이 싹트다

이번에 찾은 말사는 영도 영광사다. 전통사찰도 아니고, 단정하게 불사를 마친 도량도 아니다. 멀쩡한 곳을 찾는 것보다 허술한 곳을 찾는 게 더 빠를 정도다. 1939년에 작은 오두막이었던 법당은 굴곡진 역사를 거쳐 비로소 부처님을 모시는 도량으로 거듭났다. 일제강점기, 어둡고 침체되었던 시기, 누군가의 발원이 영광사의 시작이었다.

그렇게 80년, 빼곡한 산비탈의 민가 틈 사이로 어느 엄마, 할머니의 기도가 모였다. 넉넉하지 못한 살림에도 부처님 전에 공양미를 올리고, 어둠을 밝히는 등초 공양을 올렸다. 그것이 지금까지 영광사의 역사다.

사실 내 할머니가 다니던 절은 할아버지의 고향, 할머니의 시집살이가 시작된 곳이다. 큰집 맏며느리로 시집온 할머니의 시집살이가 편했을 리 없다. 그때마다 할머니는 어려운 살림에도 허리춤에 쌀 한보자기를 싸서 절에 갔다고 한다.

아미타불을 찾다 보면 언젠가 내 인생에도 극락이 오리라, 그 하나의 믿음은 삶을 견디는 힘이 돼 주었다. 워낙 가난했던 시골이었던지라, 장사를 위해 도회지로 나오게 되었지만, 할머니의 삶과 믿음은 그곳에 남아 있었다. 그래서 힘들 때면 더 힘들 때 의지가 되어 주었던 도량, 그 부처님을 찾았던 것이다.

“아이고 스님, 공양은 잘 챙겨 잡숫고 계신교.” 영광사의 모습에서 할머니의 뒷모습이 떠오르던 순간, 영광사 주지 범일 스님에게 전화 한 통이 걸려 왔다. “예 보살님, 뭐 해 줄라 하지 말고, 와갖고 밥이나 해 주소.” 살가운 스님 목소리에 수화기 너머로 깔깔깔 웃음소리가 들린다.

“우리절 신도는 거의 다 노보살님이에요. 절에 일 있을 때마다 구부정한 할머니들이 이 비탈진 경사를 올라와서 기도를 하고 가요. 마치고 나면 안쓰러워서, 내가 다 일일이 차로 모셔다 드리지.” 우스갯소리가 아니라, 진출입로는 어르신들이 다니기에 위험천만해 보였다. 그러다 보니 법회에 오시는 것도, 가시는 것도, 주지 스님이 일일이 챙겨야 하는 중요한 과제인 것이다.

범일 스님이 영광사의 주지 소임을 맡고 나서 시작한 일은 ‘수리’였다. 낡고 해진 것만 수리해도 만만찮은 불사금이 들었다. 지금은 여유가 되지 않아서, 조금씩 고쳐 나가는 중이다. 여전히 ‘수리 중’이다. 절 살림은 팍팍하지만 여전히 고칠 곳이 많다. 경사진 도로도 정비해야 하고, 어르신들이 쓰기 불편한 화장실도 개선해야 한다. 대웅전 문도 고쳐야 하고, 손볼 곳 투성이다. 큰 불사를 하고 싶어도 쉬이 뜻을 낼 수 없다. 불전함에 약간의 기대를 걸어보지만 역시 녹록지 않다. 물론 언제나 불전함은 가볍지만, 결코 가벼이 여기진 않는다.

“여기 오시는 할머니들이 다 쌈짓돈 들고 오시는 거예요. 근데 손주들이 좀 맛있는 거 사 먹으라고 준 돈을 갖다가 어디에 쓰겠어요. 다시 손주들 잘되라는 기도에 쓰는 겁니다. 제가 그래요. “아니, 할매요, 좀 자기를 위해 기도를 하소. 왜 자꾸 자식들, 손주들만 챙기는교.” 자기 잘되는 기도를 하라 해도 말을 안 들어요. 근데 그게 그분들 삶이니까 바뀌지 않지요. 늘 희생하고 헌신해 왔는데, 주지가 바꾸라 한들 바뀌겠어요? 그래도 잔소리는 해야지요.(웃음) 불자들 스스로가 주인공 의식을 갖지 않으면 아무리 기도를 한들 소용이 없거든요.”

스님은 불자들에게 법회 때마다 불자로서의 예절을 강조한다. 아무래도 본인의 믿음만 갖고 신심을 키우다 보니, 스님에 대한 예절이나 부처님 전에서 지켜야 할 자세에 대해 모르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라고. 처음 시작할 때만 해도 ‘아이고, 나는 모르니더.’ 하던 노보살님들도 이제는 조금씩 바뀌고 있다는 반가운 변화도 있다.

“그래도 희망이 보이는 거예요. 영도는 사실 섬이라 기복신앙이 아주 강한 곳이에요. 불교를 교리로 접근하기보다는 우상으로서 접근하다 보니, 불교공부를 알려 주기가 쉽지 않아요. 최근에는 영도구 불교연합회 회장 호법 스님이나 대원사 주지 담화림 스님처럼 이곳 영도에 변화를 일으키려는 움직임이 많이 있어요. 그런 변화가 필요하지요. 영도구 불교가 변하기 위해서는 불자 교육이 가장 시급합니다. 스님들이 뜻을 모아서 부처님 정법을 잘 일러준다면, 영도 불자들에게는 큰 기쁨이고 삶을 변화 시킬 수 있는 기회를 맞을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힘들었던 때에 의지가 되었던 사람은 잊을 수 없다. 영광사가 소박한 도량 살림에도 세월 속에 묻어 올 수 있었던 것은, 이곳을 의지하는 우리 엄마, 우리 할머니가 있었던 이유에서다. 내가 힘들었던 때에 마음 놓고 찾아갈 수 있었던 나의 의지처. 할머니는 그곳을 잊을 수 없어 10리 길을 걸었고, 노보살님들은 영광사를 잊을 수 없어 경사진 길을 오른다. 세월은 가장 위대한 유산이다. 어떠한 장인이 깎고 다듬어도 만들어 낼 수 없다. 영광사에 이름난 문화재는 없지만, 나는 이곳에서 세월이라는 유산을 발견했다. 스님의 끼니를 걱정해 주는 이웃집 할머니, 부처님 코앞에 밥 냄새가 풀풀 풍기는, 사람 냄새 물씬 나는 이곳 영광사에는 사람들의 인생사가 담겨 있는 위대한 유산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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